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문단 편집) == 논란 == 1976년 아르헨티나는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쿠데타]]가 벌어져 [[페론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호르헤 비델라]]는 [[프로파간다|월드컵을 자신의 정치 수단으로]] [[어용|삼으려 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뒷말이 많은 월드컵이 되었다. 특히 경기장 근처에서 정치범을 [[고문]]하는 등의 행위로 인하여 인권에 대해 굉장히 말이 많았다. 월드컵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것을 빌미로 이때다 하며 못했던 정치범 박해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잔인하게 임했다는 말도 많지만 여전히 논란거리다. 또한,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아르헨티나 전역에는 [[3S정책|컬러 TV가 보급된다.]] 그런 사정으로 개최국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우승에 혈안이 되었다. 지난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때의 이탈리아처럼 어떻게든 반드시 우승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조직위원회는 고심 끝에 아르헨티나에게 편한 대진표를 짜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결국 실현된다. 이로 인하여 [[베니토 무솔리니]]가 매 경기를 앞두고 주심들과 따로 만났던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거의 준할 정도의 더러운 월드컵이 되고 말았다. * [[호르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직위원회에게 '''우승 못하면 총살'''이라는 지상명령을 내렸다.[* 1978년 월드컵과 비견되는 1934년 월드컵 당시에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선수단에게 우승하지 못하면 전부 사형시키겠다는 똑같은 말을 한적이 있다.] * 개최국 아르헨티나의 첫 경기 상대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였다. 헝가리를 이끌던 전설적인 명장 [[러요시 버로티]] 감독은 '''"모든 것이, 심지어 공기조차도 아르헨티나 편이다."'''라고 역레발을 쳤고, 아니나 다를까 헝가리는 두 명의 선수가 퇴장당하며 아르헨티나에게 승리를 헌납한다. * 8강 조별리그에서 직전 대회 우승국 서독(조 2위로 8강 조별리그 진출)을 피하기 위해 16강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이탈리아에게 고의로 졌다는 의혹이 있다. * 8강 조별리그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와 폴란드의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의 켐페스가 자기편 골문으로 들어가는 공을 [[신의 손|손으로 쳐냈다.]] 하지만 주심은 켐페스의 퇴장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 후 아르헨티나 골리 필욜의 [[페널티 킥]] 선방과 기사회생한 켐페스의 멀티골로 아르헨티나는 2-0으로 승리한다. 폴란드인들은 [[무승부|승점 1점]]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을 듯. * 다음 경기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무재배]]를 쳐냈다. 그 후 브라질이 페루를 3-0으로 승리했는데 아르헨티나가 페루를 무려 6-0으로 대파 해버렸다. 그러자 바로 아르헨티나가 페루에게 차관과 곡물원조를 해줬다는 소문과 브라질이 페루에게 아르헨티나를 무재배로 막으면 선수 1인당 6만 달러씩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등 여러가지 소문들이 퍼졌다. 일설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경기 전 선수들을 격려한다는 명분으로 페루 라커룸을 방문해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 반면 브라질에서는 페루에게 '''"아르헨티나를 무승부로 막으면 선수 1인당 6만달러씩 지급하겠다"'''라고 대놓고 선언했다. * 결승전 전날 밤에는 아르헨티나 군부에서 보낸 무리들을 동원하여 자국 팀 상대인 네덜란드 선수들이 투숙한 호텔을 향해 고의로 소음과 농성을 벌여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하도록 유도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2회 연속으로 결승전에서 개최국에게 패배해 준우승에 그치자 눈물을 삼키면서 '''"우리도 월드컵을 개최하자!"'''고 외치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 놀라운 사실은 이 월드컵 결승전이 있던 엘 모누멘탈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 바로 결승경기가 있던 당일, 그 시각에 정치범을 [[고문]]하고 있었다. * 요한 크루이프는 군사독재자놈들 따위의 잔치에 장단을 맞춰줄 순 없다고 말하며 불참했다고 알려져왔으나, 사실은 그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618|본인을 포함한 가족들이 모조리 납치되었다가 구조된 사건]]이 발생해서 집을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월드컵에 불참했다. 크루이프는 이 사실을 계속 숨겨오다가 2006년이 되어서야 공개했다. * 아르헨티나는 1950년 월드컵 개최권을 브라질에, 1962년 월드컵 개최권을 칠레에, 그리고 1970년 월드컵 개최권을 멕시코에 내주며 번번이 유치 경쟁에서 고배를 들이켜 온 국가다. 그로 인해 1978년 월드컵 성공에 대한 의지가 매우 남달랐으며, 메노티 감독은 대회 3년 전부터 지속적인 합숙훈련까지 실시하며 조직력을 다져나갔다. 이 덕에 아르헨티나는 국가대표로 차출된 선수들이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리그로 복귀하지 못했다. 게다가 스페인 리그인 발렌시아에서 뛰고 있던 마리오 캠페스를 국내로 불러온 뒤 구단에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가면서 마리오 켐페스를 월드컵이 끝나는 순간까지 국가대표에서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염원하던 홈 관중들은 두루마리 휴지 응원으로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하는 한편,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를 연호하며 뜨거운 현지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는 훗날 아르헨티나 팬들의 응원구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원래 아르헨티나는 적당한 인구와 시장성, 공업력 그리고 넘쳐나는 자원으로 1960년대까지 남미의 스위스라고 부를 정도로 부국이었으나 오랜 군사독재 기간동안 경제력이 바닥을 칠 조짐을 보였다. 당시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는 자신과 군사정권에 인기를 유지하고 정치로부터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월드컵에 앞장서서 개최했는데 이게 제살 깎아먹기 식으로 엄청난 비용이 들어 많은 장관과 경제학자들이 반대했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 결국 월드컵 우승컵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후로 아르헨티나는 외채부담으로 인해[*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도 호르헤 비델라가 시장개방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외채를 대거 도입하였는데 미당국이 물가잡겠다고 고금리 정책을 폈던 덕택에 막대한 예산을 이자갚는데 써야될 판이 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외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투자자 유치하겠다고 임금과 복지예산은 무지막지하게 깎아냈기 때문에 이득을 본건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 아르헨티나 인들 입장에서는 뭐 주는것도 없는 주제에 수백억 달러의 외채와 실업률만 잔뜩 남겨놓은 꼴이 되었다. 일부 우파 진영에서 아르헨티나 쇠락의 원인을 단순히 [[페론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이건 오류에 가깝다.]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고 실업률도 18%를 기록하는 침체를 기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